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은 ‘핵물질 생산기지와 핵무기연구소’를 현지지도하며 “올해 무기급 핵물질 생산계획을 초과 수행하고 나라의 핵방패를 강화하는 데서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문했다고 지난 29일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은 ‘핵물질 생산기지와 핵무기연구소’를 현지지도하며 “올해 무기급 핵물질 생산계획을 초과 수행하고 나라의 핵방패를 강화하는 데서 획기적인 성과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문했다고 지난 29일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한반도 비핵화는 종언을 고한 것일까? 냉정하게 보면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북한)은 비핵화를 접고 “불가역적인 핵보유국”을 추구하고 있고, 미국 등 국제사회에서도 비핵화가 실현 가능한 목표라고 보지 않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렇다면 비핵화가 사라지고 있는 자리에 무엇을 채워야 할까? 낯설고도 고통스러운 질문이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일단 비핵화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한국의 주류 담론이고, 한국이 비핵화라는 목표를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좌고우면하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를 강하게 설득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게 가장 무난하고 편리한 접근일 수는 있지만, 그럴수록 트럼프 행정부가 의지를 보이고 있는 북미 대화는 희박해지고 북핵 고도화는 선명해질 것이라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이는 한반도 안보 불안의 상시화로 이어져 한국이 입게 되는 안보적·경제적·외교적 이익 훼손을 수반하게 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맹을 ‘거래주의적 시각’ 으로 접근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트럼프가 비핵화 기조를 유지해도 이럴 관철할 수단이 마땅한 것도 아니다. 미국이 가장 강력한 도구로 삼았던 대북 제재는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도 무용론이 나올 정도이다. 그렇다고 트럼프가 타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동원하는 관세가 대북정책의 무기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선과 미국 사이에 무역이 전무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2017 년처럼 말폭탄과 무력시위를 동원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본인이 취임 일성으로 강조한 “피스메이커” 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그가 노리고 있는 노벨평화상과도 멀어지게 할 것이다.


한국의 자체 핵무장으로 비핵화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려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 한국의 핵무장은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을뿐더러 자해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 거론하는 미국 핵무기 재배치도 마찬가지이다. ‘문 뒤의 총’을 문 앞에 갖다놓는 순간 핵 군비경쟁의 격화는 물론이고 핵전쟁의 위험도 더욱 커질 것이다. 또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추구하겠다는 트럼프의 대북정책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 미국의 확장억제를 한층 강화하는 것도 부작용을 키울 것이라는 점은 윤석열-바이든 시기에 똑똑히 경험한 바이다.

그럼 비핵화를 포기해야 할까? 나는 그래야 한다고 본다. 비핵화가 빠진 자리엔 ‘군비통제와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 로 채워야 한다고 본다. 이때 군비통제를 ‘비핵지대의 과정’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또 ‘마차가 말을 끄는 방식’에서 ‘말이 마차를 끄는 방식’으로의 전환도 도모해야 한다. 대북 제재 해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미·북일 수교 등 비핵화의 상응조치를 ‘뒤’로 뒀던 과거의 방식과 결별하고 비핵지대 창설 ‘앞’에 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비핵지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비핵지대는 중남미, 아프리카,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에 걸쳐 세계 면적의 50% 를 차지할 정도로 하나의 국제 규범이자 현실로 자리잡아왔다. 이렇듯 비핵지대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실현되어왔다는 점은 한반도 핵문제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에 유용할 수 있다. 더 큰 유용성은 한반도 비핵화에는 ‘합의된 정의’가 없고 이것이 비핵화 협상에 실패로 돌아간 핵심적인 사유였던 반면에, 비핵지대에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의가 있다는 점에 있다.

비핵지대는 특정 지역 내에서 핵무기 및 핵 위협이 없는 상태를 구현하기 위한 국제조약을 일컫는다. 이에 기초해 유엔 군축위원회는 1999 년에 비핵지대 가이드라인을 제정했고 그해에 유엔 총회도 이를 승인한 바 있다. 핵심적인 내용은 “해당 지대 내 핵무기의 부재, 즉 핵무기의 개발, 제조, 실험, 보유, 배치, 접수, 반입 등을 금지” 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반도 비핵화와 유사하다. 그런데 비핵지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핵보유국들이 해당 지대 국가에 대한 핵무기의 사용 및 사용 위협을 금지하고 핵무기 배치도 금지한다.” 그래서 비핵지대는 지대 내 국가들의 조약뿐만 아니라 5 대 공식 핵보유국들의 의정서 체결도 의무이다.


이러한 내용에 기초할 때, 한반도 비핵지대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핵무기를 개발·생산·보유·실험·접수를 하지 않고, 핵보유국들은 한국과 조선에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고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적 구속력을 갖춘 형태로 보장한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동상이몽이 너무나도 컸던 비핵화는 달리 명확하고 공정한 정의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한반도 문제에 관한 대화와 협상이 재개되면 당사국들은 비핵화의 개념을 둘러싸고 또다시 헤맬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비핵지대의 정의와 목표를 핵문제의 해법으로 삼는 것이 현명하다. 또 조선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핵보유국들의 핵 불사용·불위협을 제도화함으로써 우리 안보도 증진하는 효과가 크다. 아울러 일본도 지대 내 국가로 참여하는 ‘동북아 비핵지대’를 타진해볼 수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미동맹에 대한 태도를 달리하고 있는 것도 비핵지대 논의에 활력을 줄 수 있다. 조선이 1990 년대 초까지 제안했던 “조선반도 비핵지대”에는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과 한미연합훈련의 중단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미국이 비핵지대를 거부하고 비핵화를 제시한 핵심적인 사유로 작용했다. 이에 반해 트럼프 행정부는 한미연합훈련과 미국 전략 자산 전개의 축소나 중단, 주한미군 감축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비핵지대 과정으로서의 군비통제’를 추진하는 데에 유망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북핵 동결 · 감축과 축소지향적인 한미동맹 재편’ 의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한반도나 동북아 비핵지대가 정착되면, ‘주한미군 없는 한미동맹’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더라도 미국의 확장억제 및 한국의 대북 군사적 우위는 유지될 것이기에 고려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말이 마차를 끄는 방식’도 고민해야 할 때이다. 기실 2018년 6월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나온 공동성명도 이런 취지를 품고 있었다.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 한반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실현 순서로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 기 트럼프 행정부는 사실상 ‘선 비핵화’를 고수했고 문재인 정부도 ‘한반도 비핵화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에 머물렀다. 일본도 조선의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을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핵심 쟁점이었던 대북 제재도 ‘완화를 통한 설득’이 아니라 ‘강압을 위한 강화’ 에 머물렀다. 이렇게 상응조치를 북핵 해결의 뒤로 두는 방식은 과거에도 통하지 않았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핵문제 해결의 희망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핵 불사용· 불위협을 보장하는 전쟁 방지와 평화공존을 위한 신뢰구축 → 대북 제재 완화와 군비통제를 통한 평화체제와 비핵지대 여건 조성 → 남북미중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북일수교를 통한 한반도 냉전 구조 청산→한반도(동북아) 비핵지대 창설’이라는 프로세스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지려면 상기한 조치들이 한미일이 조선에 시혜를 베푸는 것이고 조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일방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조선의 긍정적인 조치에 발맞춰 제재를 완화하면 조선도 이롭지만, 한국 등 대북 교류와 경제협력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들에게도 이로울 수 있다. 군비통제와 군축을 통해 조선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점차적으로 줄여갈 수 있다면, 북핵이 늘어나는 것보다는 확실히 이롭다. 군비경쟁의 완화는 각국의 내부 문제 해결을 위한 재원 마련과 기후위기 대처에도 기여한다. 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을 통해 전쟁 방지와 평화정착을 실현하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 된다. 이렇게 서로가 이로운 길을 걷다보면 비핵지대 논의도 본격화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이 핵무장에 집착해온 안보적·외교적 · 경제적 동기를 해소하고 ‘명예로운 선택’을 고려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반도 핵문제의 새로운 접근인 비핵지대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실현된 바 있기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을, 한때 한반도 핵문제 해법으로 검토된 적이 있었기에‘ 온고지신(溫故知新)’ 을 품고 있다. 또 한반도(동북) 비핵지대에는 조선이 비핵화 협상 시기에 주장했던 ‘조선반도 비핵화’와 일부 유사한 내용도 있다. 그래서 친북적인 주장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비핵지대는 친북적인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국제 규범이자 거의 모든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핵문제 해결을 도모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다. 지금까지 비핵화를 향한 접근은 대북 제재와 무력시위 등 압박에 치우쳤고, 조선이 핵을 포기하면 이것저것 해주겠다는 설득은 ‘그림의 떡’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비핵지대는 조선이 과거에 제안했었고, ‘조선반도 비핵화’와 친화성이 있으며 , 공정하고 균형적인 핵문제 해결을 포함하고 있다. ‘강압’에 의한, 그래서 실패를 되풀이해온 방식이 아니라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은 ‘공감’을 통한 접근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도전과 기회를 준별해내고 기회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지혜를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돌아온 트럼프는 ‘두 얼굴의 사나이’ 처럼 두 가지 카드를 던졌다. 하나는 ‘세계의 비핵화’ 를 위해 러시아·중국 등과 핵군축 회담을 추진하겠다는 것이고 , 또 하나는 미국 본토를 ‘철옹성’으로 만들겠다며 ‘미국판 아이언 돔’ 구축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어디에 본심이 있는지는 예단하기 어렵지만, 전자는 기회를, 후자는 도전을 품고 있다. 트럼프가 레이건의 ‘스타워즈’를 부활시키면 핵보유국 사이의 군비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조선도 세계 최강의 공격력을 보유한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을 뚫을 수 있는 전략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핵보유국들의 핵군축 회담이 가시화되면 한반도 (동북아) 비핵지대 논의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핵군축은 국가안보와 동맹 전략에 있어서 핵무기 의존도를 줄여간다는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핵군축 회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외교력을 발휘하면서 이로부터 비핵지대 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 유망한 요소를 추출해야 한다.

물론 한반도나 동북아 비핵지대 실현은 멀고도 험한 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 세계에서 시간의 중요성은 물리적인 길이뿐만 아니라 화학 작용에도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 될 수도, 가까운 미래에 손에 잡히는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비핵화가 사라지고 있는 자리에 비핵지대로 채워보자고 호소하는 까닭이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겸 평화네트워크 대표 [email protected]